남궁혁, 탁월한 인재 그러나

남궁혁은 우리의 첫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였고, 신약학을 가르쳤으며, 『신학지남』을 편집했다

필자는 남궁혁(南宮爀, 1882-1950년 납북)에 관심을 갖고 있다. 먼저는 그가 전남노회에서 안수를 받은 목사이고 신학자이다. 다만 주도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는 아니다. 그런데 존경하는 정성구 박사께서 게재하신 남궁혁에 관한 글을 보면, 필자가 그동안 그려 온 남궁혁과 상당히 다른 면을 보았다. 그 가운데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남궁혁을 순교자로 세운 것이다.

​남궁혁은 우리의 첫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였고, 신약학을 가르쳤으며, 『신학지남』을 편집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총신대학교나 장로회신학대학교나 한신대학교 어느 곳에서도 남궁혁을 자기 신학의 원점으로 삼지 않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의 세 신학 노선 가운데 어느 한편도 남궁혁의 신학을 직접 계승했다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잊혀진 신학자일 것이다. 그런데 정성구 박사의 주장은 새로운 기원에 대한 제언인가?하는 조심이 있다. 그런데 남궁혁을 ‘공산당에게 처형당한 순교자’로 규정하면 상황이 달라진다(정성구 "공산당에 순교한 한국 최초의 신학박사 남궁혁", <트루스데일리>, 26년 2월 20일). 순교자로 공인된 인물은 자연스럽게 교단의 신앙 자산으로 들어온다. 그의 신학에 관한 검토보다 그의 죽음이 먼저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잊힌 첫 한국인 교수

 

​남궁혁은 188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공부했고, 대한제국 해관에 들어가 인천과 목포에서 근무했다. 목포에서는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기독교 신앙과 목회자의 길을 받아들였다. 광주 숭일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 뒤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버지니아 리치먼드의 유니언신학교에서도 수학했다. 귀국 후 평양장로회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 부임하여 신약학을 가르쳤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수진은 선교사들이 중심이었다. 그런 강단에 한국인 교수가 들어왔다는 것은 상징성이 큰 일이었다. 선교사에게 신학을 배우던 단계에서 한국인이 신학을 가르치는 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남궁혁은 1928년부터 『신학지남』 편집을 맡았다. 『신학지남』은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드러내는 중요한 잡지였다. 남궁혁이 편집을 맡았다는 것은 선교사들이 주도하던 신학 담론에 한국인이 본격적으로 참여했다는 뜻이다. 그는 선교사 교수들의 글과 강의를 번역하고, 자신도 성경 강해와 설교와 신학 논문을 발표했다. 박형룡과 김재준을 비롯한 후배들이 글을 발표할 수 있도록 편집 공간도 제공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남궁혁은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

 

​첫 신학박사라는 칭호

 

​정성구 박사는 남궁혁을 한국 최초의 신학박사라고 소개하면서, 그가 1925년 리치먼드 유니언신학교에서 Ph.D.를 받았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확인되는 자료에 따르면 남궁혁이 받은 학위는 Ph.D.가 아니라 1929년에 수여된 D.D.였다. D.D.는 신학박사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연구논문을 제출하여 취득하는 Ph.D.와는 구별해야 한다.

 

남궁혁을 “한국 최초의 신학박사”라고 부르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그 명칭 자체를 무조건 거부할 필요는 없다. 다만 어떤 학위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받았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남궁혁을 높이기 위해 D.D.를 Ph.D.로 바꾸면 오히려 인물 연구의 신뢰를 떨어뜨린다. 역사 진술에서는 될 수 있는대로 팩트(fact)를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모호한 사실은 진술이 되어야지 어떤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은 부당하다.

 

​탁월한 언어 능력과 정통신학

 

​남궁혁은 영어에 탁월했다.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배웠고, 해관에서 영어 능력을 사용했으며,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미국 유학도 일찍 다녀왔다. 평양신학교에서는 선교사 교수들의 강의와 글을 번역했고, 성경 개역에도 참여했다. 『신학지남』을 편집하며 서양 신학이 한국어로 전달되는 통로를 마련했다.

 

​그러나 탁월한 언어 능력과 정통신학은 같은 것이 아니다. 외국어를 잘한다는 것이 그 언어로 들어오는 신학을 정확하게 분별한다는 뜻은 아니다. 번역 능력은 신학을 전달하는 중요한 도구이지만,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는 별도의 교리 판단을 요구한다.

 

​남궁혁은 신학을 전달하는 데 탁월했지만, 박형룡, 김재준처럼 하나의 체계를 세우지는 않았다. 그의 활동에서는 교리의 경계를 세우기보다 사람과 언어를 연결하는 모습이 더 두드러진다. 그는 박형룡을 아꼈지만 김재준과 송창근도 포용했다.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걸은 사람들이 남궁혁의 편집 공간 안에서는 함께 활동했다. 『신학지남』 활동 지면을 보면 남궁혁은 오히려 송창근이나 김재준과 더 폭넓게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2012년 “한국장로교회 100년, 회고와 전망”이란 주제로 개최된 개혁신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 “각 교단 신학지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논의 고찰을 통한 한국장로교회 100년의 성령 이해 고찰”을 발표했었다. 그 때 신학지남 시대에 성신과 성령의 전환기에 남궁혁이 위치한 것으로 분석했다. 당시 『신학지남』에는 「성신의 인격과 사업」, 「성신 받는 길」처럼 ‘성신’이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었다. 그런데 남궁혁은 1931년에 「聖靈과 敎會」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그가 당시 통용되던 ‘성신’ 대신 ‘성령’을 사용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성신을 주장한 신학자는 왕길지 선교사였고, 성신을 지금까지 유지하는 진영은 김홍전 박사 계열이다.

 

​물론 남궁혁 한 사람이 Holy Spirit을 ‘성령’으로 확정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성령’이라는 번역어가 등장하면서, 그 용어가 한국교회에 정착되었고 기존에 사용되던 '성신'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필자는 Holy Spirit을 성신에서 '성령'으로 전환 번역한 것을 정통적 신학 의식으로 보지 않는다. 비록 후대인으로 '성령'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렇다.

 

​박형룡을 아꼈다는 것

 

​정성구 박사는 남궁혁이 박형룡을 끔찍이 사랑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남궁혁은 박형룡의 결혼 주례를 맡았고 산정현교회 위임식에서 설교했으며, 박형룡이 평양신학교 교수로 들어오도록 도왔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두 사람의 가까운 인적 관계를 보여 준다. 그러나 박형룡을 아끼고 후원했다는 사실과 박형룡 신학의 원점이었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한다.

​박형룡 신학의 직접적인 배경은 구 프린스턴 신학, 찰스 하지와 벤저민 워필드의 성경관, 메이천의 자유주의 비판, 미국에서 수행한 변증학 연구였다. 박형룡은 이러한 신학을 한국 장로교회의 교리 체계로 정리했다. 남궁혁에게서 박형룡의 교의학 체계와 변증학 방법이 나왔다고 볼 만한 자료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남궁혁은 박형룡의 신학적 원점이라기보다 제도적 입구였다고 해야 한다. 박형룡이 평양신학교와 『신학지남』에서 활동하도록 길을 열어 준 선배였다. 인적 후원과 신학 계승을 같은 것으로 만들면 두 사람을 모두 잘못 이해하게 된다. 박형룡과 남궁혁의 신학적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는 없다. 물론 김재준과 남궁혁을 연구한 연구물도 없다.

 

​남궁혁은 박형룡만 후원하지 않았다. 김재준과 송창근도 그의 후배였고, 『신학지남』 편집에 참여했다. 그는 총신과 장신과 한신의 신학이 분명하게 갈라지기 전, 여러 신학자가 함께 활동하던 평양신학교의 넓은 공간을 대표한 인물에 가깝다.

 

​납북과 순교 사이

 

​정성구 박사의 글에서 가장 신중하게 살펴야 할 부분은 남궁혁의 마지막 모습이다. 남궁혁이 1950년 8월 2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납북된 것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납북 이후 그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활동한 사항이나 죽음의 조건들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글의 제목과 결론에서는 “공산당에 처형당한 신학자”, “공산당의 총칼 앞에 쓰러진 순교자”라고 제시했는데, 정확한 근거가 없다. 증거에 의한 제시가 아닌 확신으로 제시한 주장이다. 가능성은 있지만 가능성은 가능성 영역에 있어야 한다. 가능성을 수 만번 반복해서 사실영역으로 올리는 것은 역사나 학문에서 적합하지 않다. 신학에서도 수많은 가설이 반복되면서 마치 정설이 아니면서 정설처럼 유통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당시 공산군은 양주삼 총리사, 송창근 목사, 김유순 감독 등 교파를 불문하고 서울에 남아 있던 대표적 기독교 지도자들을 납북했다. 납북이 순교와 동일화될 수 없다. 공산군에게 납북되었다는 사실은 그 사람이 공산주의의 피해자였음을 보여 주지만,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신학과 생애 전체를 보증하거나 순교를 확정하지는 않는다.

 

​남궁혁을 남궁혁으로 읽기

 

​정성구 박사께서 잊힌 남궁혁을 다시 소개한 것은 감사한 일이다. 한국교회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였던 남궁혁은 그 자체로 충분히 독자적인 연구 주제가 된다. 그의 『신학지남』 논문과 성경 강해, 번역 활동, 성경 개역 참여 등 그의 업적이 많다. 그리고 그의 후진인 박형룡, 김재준 등은 한국 장로교회의 중요한 축이다.

 

​즉 남궁혁의 공헌은 분명하다. 그는 한국인으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교수였다. 선교사들의 신학을 한국어로 전달했고, 한국인 신학자들이 글을 발표하는 공간을 마련했다. ‘성신’이 통용되던 시대에 ‘성령’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의 유연한 언어 감각을 보여 준다.

 

남궁혁을 박형룡의 신학적 선배이자 그를 평양신학교 교수로 세운 인물로 부각하고, 확인되지 않은 최후를 공산당에 의한 순교로 규정한다면 남궁혁은 한국 장로교회사에서 매우 선명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한국 최초의 신학박사’, ‘평양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 ‘박형룡을 세운 선배’, ‘공산당에게 처형된 순교자’라는 요소들이 결합하면, 남궁혁은 자연스럽게 한국 보수 장로교회의 원점에 놓인다. 정성구 박사께서 이 역할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위상을 갖는 것은 좋지 않다. 아직 그의 신학이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고, 박형룡과의 신학적 관계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납북 이후의 행적과 사망 경위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호한 영웅의 출현은 과거가 현재에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만져 자신이 원하는 인물로 빚는 모습이다.

 

형람서원 고경태 박사

작성 2026.09.03 02:19 수정 2026.09.0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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