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영어는 달라야 한다 -bigot

광신도, 광신주의, 편협한 사람

출처: The Daily Show

 

 

  어른의 영어는 달라야 한다. bigot 편협한 사람, 꼴통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Scepticism and Tolerance’를 읽으며 김태형 심리학자의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를 생각하며 읽었다. 지방에서 오래 살았고 서울과 외국에 잠시 살아 본 경험으로 지방 사람이 서울과 같은 대도시 사람에 비해 보수적인 것은 인지하고 있다. 나쁘고 좋은 것이 아니라, 변화가 적고 구성원이 잘 변하지 않는 지방은 새로운 것에 대해 받아들이는 속도가 느리다. 심한 경우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을 표하기도 한다.

 

  이 소논문은 원래 1949년 BBC에서 방송되었던 ‘“Why Fanaticism Brings Defeat,”에서 온 글이다. 역사적 사건에서 광기가 이성을 이겼던 사례를 통해 왜 사람들이 편협하게 행동하는 지에 대해 고찰하는 글이다.

  이 때 편협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로 ‘bigot’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온라인 캠브리지 영어 사전에 따르면 ‘bigot’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a person who has strong, unreasonable beliefs and who does not like other people who have different beliefs or a different way of life:

 

  버트란드 러셀도 비슷한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다.

 

Nothing can be more hopeless than a population of disillusioned bigots, who have lost the capacity to be rational, and have no longer any outlet but despair for their irrationality.

 

  ‘bigots’라는 단어 뒤 정의를 보면, 이성적일 능력을 상실하고 비인성적 절망만을 표출할 뿐이라고 설명한다. 편협한 사람은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성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다.

  BBC 방송 제목에 쓰였던 ‘Fanaticism’과 어떤 맥락에서 통하는 단어이다. ‘Fanaticism’은 우리말로 광신주의에 해당한다. 온라인 캠브리지 영어 사전 정의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extreme beliefs that may lead to unreasonable or violent behaviour:

 

버트란드 러셀은 이런 광적인 믿을을 가진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Fanatics are unwilling to accept scientific discoveries made by their enemies, and therefore soon fall behind those whose outlook is more cosmopolitan.

 

  광신도(Fanatics)는 적이 발견한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계시민주적 전망을 가진 사람들보다 곧 뒤쳐지게 된다. 광신도나 편협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나 변화하는 사회를 이해하기보다 과거 사실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들은 회의적이기 쉽다. 새로운 세상, 변화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기에 대체적으로 긍정적이고 관용적인 사고를 하기 어렵다고 한다. 주변에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과 어울리기 어렵게 된다. 그러다 보니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고 한다.

 

 

  아주 오래 전에 독재자를 찬양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이야기했던 방송 평론가도 비슷한 농담을 한 적이 있다. 그들과 논리를 가지고 대화할 수 없다. 그들처럼 감정적인 방식으로 대화해야 한다고 했다. ‘네 눈이 어떠니까 넌 그런 사람이야.’라고 한다든지 그들이 공격하듯이 이야기하면 자신은 똑같은 말투로 이야기한다고 했다. 물론 이건 대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평론가는 반은 농담으로 그들의 비이성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 같다.

 버트란드 러셀은 이런 편협성과 반대하여 ‘tolerance’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관용’으로 흔히 번역하는 ‘tolerance’는 프랑스가 선진국이 될 수 있는 높은 가치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편협한 류들은 이 관용을 부수려고 해서 서구는 어렵게 이 가치를 배우고 있다고 한다. 과학에 기반을 둔 사고로 관용을 배우고 있고, 경험상 관용이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관용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인간은 진보를 해 왔다고 버트란드 러셀은 생각한다.

 

  이 생각은 1949년 뿐 아니라 지금도 통하는 생각 같다. 과학의 발전으로 이성이 발달하고 논리적 사고가 발달했다. 하지만 아직도 미신에 매달리고 비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더 문제는 이들이 자신이 옳다고만 생각해서 다른 이들의 생각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다.

  게다가 이들은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 그들의 극단적 행동은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을 방해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늘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관용을 베풀며 살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만드는 평화를 편협한 생각을 가진 이들은 서슴없이 파괴한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는 이런 편협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부수는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을 방치해야 하는가이다. 올림픽 공원에 모인 사람들로 주변 주민들은 일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남의 생각을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디까지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지 질문하고 싶다.

 

시위대에게 몸수색당하는 시민

 

 

 

작성 2026.08.27 20:39 수정 2026.08.2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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