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일상에서 애써 공들인 일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본래의 허탈한 상태로 되돌아갔을 때 흔히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친숙하게 입에 붙은 이 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43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올랐던 조선 선조 임금의 수라상과 얽힌 기막힌 음식 야사(野史)가 숨어 있습니다.
피란길 굶주린 선조의 입을 사로잡은 생선 '묵'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북쪽 의주로 몽진(蒙塵·피란)의 길을 떠났습니다. 전쟁 통에 임금의 피란 행렬이라 한들 제대로 된 곡식이나 반찬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비바람과 추위, 극심한 배고픔에 지쳐 있던 선조 일행이 동해안 인근에 머물 때, 한 가난한 어부가 임금을 위해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을 정성스레 구워 올렸습니다.
당시 백성들이 '묵'이라 부르던 흔하고 볼품없는 작은 생선이었습니다. 하지만 며칠을 굶주린 임금에게 갓 구워낸 생선의 부드럽고 고소한 살점은 천하제일의 진미였습니다. 눈물겹게 생선을 맛본 선조는 감탄하며 어부에게 물었습니다. "이토록 달고 맛있는 물고기의 이름이 무엇이냐?" 어부가 "'묵'이라 하옵니다"라고 아뢰자, 선조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습니다. "이처럼 은빛 비늘이 곱고 맛이 빼어난 물고기에 어찌 투박하게 '묵'이란 이름을 붙이겠는가. 앞으로는 은어(銀魚)라 부르도록 하라!" 그렇게 초라한 생선 '묵'은 임금의 은혜를 입어 귀한 '은어'로 신분 상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로 묵이라 하라!" 배부른 궁궐에서 터져 나온 실망
전쟁이 끝나고 왜군이 물러가자, 선조는 마침내 한양 궁궐로 환도했습니다. 다시금 전국 각지에서 진상된 산해진미가 가득한 구첩반상 수라상을 받게 된 선조였지만, 문득 피란길 굶주림 속에서 눈물겹게 맛보았던 그 기막힌 '은어'의 맛이 간절하게 떠올랐습니다.
선조는 곧바로 어명을 내려 동해안에서 은어를 잡아와 수라상에 올리라 명했습니다. 이윽고 정갈하게 구워져 대궐 수라상에 오른 은어 한 점을 선조가 기대에 차서 입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얼굴은 이내 일그러졌습니다. 피란길의 그 황홀했던 감칠맛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뼈가 억세고 기름지며 비린 맛만 감도는 평범한 생선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실망한 선조는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혀를 찼습니다. "에이, 맛이 예전 피란길만 전혀 못하구나. 은어라는 이름이 아까우니 도로 묵이라 불러라!" 임금의 이 한마디에 생선은 다시 원래의 이름으로 강등되었고, 백성들은 이를 가리켜 '도로 묵', 즉 '도루묵'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큰 기대를 걸고 공을 들였어도 허무하게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 상황을 이르는 "말짱 도루묵"이라는 속담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음식의 참맛은 혀끝이 아닌 '상황과 결핍'에 있다
도루묵의 어원을 곱씹어보면 인간의 간사한 입맛과 심리를 꿰뚫는 날카로운 미식 철학을 발견하게 됩니다. 피란길의 선조에게 생선 묵은 굶주림이라는 최고의 양념이 더해져 천상의 맛으로 다가왔지만, 배가 부르고 기름진 음식에 젖어든 궁궐에서는 그 진가가 온전히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음식의 참된 가치는 값비싼 식재료나 화려한 치장이 아니라, 음식을 대하는 사람의 간절함과 진심 어린 상황에서 피어납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리와 삶의 해학
살다 보면 애써 쌓아 올린 계획이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말짱 도루묵'이 되는 허탈한 순간을 누구나 겪습니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이를 절망으로 끝맺지 않고, 본래의 순수한 자리로 돌아가는 해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아무리 분에 넘치는 이름표를 달아도 결국 진정한 내 본모습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라는 겸양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찬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늦가을, 동해 바다에서는 알이 톡톡 터지는 제철 도루묵이 제철을 맞이합니다. 오늘 저녁, 노릇하게 구워낸 도루묵 한 접시를 식탁에 올리며, 헛된 욕심을 내려놓고 소박한 밥상 한 끼의 고마움을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미식1947 김아윤 기자 (ay7479@misik.net)
[핵심 황금 키워드 30]
도루묵, 말짱도루묵, 도루묵유래, 도루묵어원, 도로묵이라하라, 선조피란길, 임진왜란생선, 은어유래, 우리말어원, 우리말산책, 관용구유래, 속담유래, 한국어어원, 옛말유래, 민속학, 생활인문학, 수라상이야기, 조선왕실음식, 전통식문화, 제철생선, 알도루묵, 동해안생선, 미식이야기, 음식인문학, 인생의지혜, 해학, 사자성어, 김아윤기자, 미식1947, 미식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