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것을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하고 또 사람의 처지를 바꿔 놓으면 그 처지에 동화되어서 하는 것이 같게 된다는 뜻으로 역지개연(易地皆然)이란 말이 있다. 이 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두 마디만 이해하고 마음속 깊이 되새긴다면 우리 모두 철이 좀 들 수 있으리라.
‘철들자 망령’만 아니라면 말이다. 몇 해 전에 본 한 짤막한 기록영화가 잊혀지지 않는다. 영국통치 2백 주년을 맞아 호주 원주민 단체가 만든 다큐멘터리로 그 제목은 ‘바바키우에리아’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현대 호주 백인 한 가족이 단란하게 바닷가에서 바비큐 불고기 파티를 즐기고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국방색 카키 군복을 입은 원주민들이 배를 타고 등장한다.
‘신대륙’을 발견해 신기해하는 눈으로. 오만방자하게 거들먹거리는 우두머리가 하선하면서 천천히 묻는다. “이-곳-을-너-희-들-은-뭐-라-부-르-느-냐?” 놀라면서도 순진하게 반기는 기색으로 백인 가족의 가장이 대답한다. “뭐라니요? 바비큐 하는 곳이지요.” 그러자 원주민 두목이 “괜찮은 토착명이군” 중얼대고는 그의 부하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외친다. “나 이곳을 Babakiueria라 이름 지어 부르겠노라!” 그리고는 깃발을 꽂는다.
이 영화의 나머지 부분에선 원주민 정복자들의 의도는 좋으나 잘못된 인식으로 집행을 실시하는 정책 때문에 점점 더 절망적인 상태로 전락하는 백인 가족을 추적한다. 정복자들은 재향군인의 날 시가행진을 금한다. 전쟁을 미화하고 칭송하는 만행이라며. 백인 문제 담당 부서 장관인 한 원주민은 우월감을 갖고 자못 은혜를 베푸는 듯한 태도로 생색내듯 미소를 띠고 백인들의 의식화된 축구, 폭도들의 난동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백인들의 야만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백인들의 거센 항의 따위는 아랑곳없이 모든 고속도로를 다 파헤쳐 그 자리에 푸른 초원과 나무가 무성한 숲을 일군다.
그리고 백인들에게 원주민 문화를 소개하고 가르친다. 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대가족제도를 해체, 분산시켜 척박한 불모지로 내몰아버리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걸’ 마치 백인들의 처지를 부러워하듯 그는 한숨짓는다. 영화는 유리 깨지는 소리로 끝난다. 백인 가족의 10대 아들이 극에 달한 분노와 절망감에서 돌을 던진다. 자신의 가족과 백인들의 생활방식에 갑자기 일어난 엄청난 변화에 대한 항의로. 교육받지 못해 아무런 자원도 없이 그는 한평생 범죄와 알코올에 찌든 빈곤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났을 뿐이다.
이처럼 ‘바바키우에리아’는 주객이 전도된 역사적인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백인식민제국주의의 결과와 그 비극적인 결말을. 다른 사람들의 동의도, 참여도, 그들에 대한 문화적인 이해도 없이 그들을 계몽하고 개명시켜 그들의 운명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초래한 미증유의 대참사와 이를 촉발시킨 독선과 위선을 고발한다. 이렇게 이 영화는 하나의 객관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단지 호주에만 국한해서가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말이다.
“희극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비극”이고 “세상에 삶과 죽음 그 밖에는 아무것도 죽고 사는 사활의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영국작가 앤절라 카터의 ‘슬기로운 아이들’에서 이 작품의 화자인 도라 챈스는 격언처럼 말한다. 그 한 예로 권투경기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권투선수에게는 사생관두(死生關頭)의 죽음과 삶이 달린 위태한 고비가 관객에게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되니 말이다.
지난 2016년 6월 3일 타계한 20세기 최고의 복서로 불리는 복싱황제 무하마드 알리는 권투경기장 사각의 링 위에서 상대방 선수와 싸웠다기보다 세상이란 링에서 인간사회에 만연한 위선과 독선이란 색안경을 낀 관객들을 상대로 맞서서 싸워온 것만 같다.
12살 때 복싱에 입문하여 18세에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 곧 프로로 전향, 1964년 당시 세계 챔피언이던 소니 리스톤을 7회 K.O. 승으로 물리치고 세계 정상에 올랐으나 그 뒤 1967년 월남전 참전 거부로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했다가 1970년 또다시 링으로 돌아와 1974년 조지 포먼을 꺾고 세계 챔피언 벨트를 되찾아 그 후로 은퇴, 복귀를 되풀이하다가 1981년 61전 56승(37KO) 5패를 기록하고 링을 아주 떠난 ‘떠벌이’ 알리는 링 안에서보다 링 밖에서 그의 활약이 더 컸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왔다.
“오늘날 우리 세계에는 두 백색 악한이 있다. 하나는 소련의 백색 악한이고 또 하나는 미국의 백색 악한이다. 이들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악한들이다. 이 둘이 싸우기 시작하면 우리 작은 유색 인종들은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 된다.”
이것은 1980년 초 전 미국 대통령 카터의 특별외교사절로 아프리카에 도착한 알리의 발언이다. 그의 유명한 ‘나비처럼 날면서 벌같이 쏘는’ 스타일로 그는 세계의 두 거인을 링 코너로 한데 몰아넣고 보기 좋게 더블 잽을 먹였다. 두 백색 골리앗 중 어느 쪽이 이 쪼그만 깜둥이 소년의 고무줄 새총이 아닌 입줄 말펀치를 맞고 꿈적이나 했을까. 모르긴 해도 그를 수행했던 미 국무성 관리들은 아연실색했을 것이다.
미국이 주동한 모스코바 올림픽 보이콧에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동조를 얻으라고 파견된 알리가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개구일성(開口一聲) 말하기를 “잘못된 일을 위해 내가 잘못 이용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뉴질랜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스포츠 교류에 항의하는 뜻에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가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을 보이콧했을 때 동조하지 않았던 미국인데 이번에는 미국이 보이콧하는 올림픽에 왜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불참해야겠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알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들이 좋은 질문 해줘서 정말 고맙다. 당신들이 날 깨우쳐주었다. 같은 내 형제 유색인종에게 난 배신자가 될 수 없다. 잘못인 줄 안 이상 난 당장 이 여행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카터 대통령에게 따져봐야겠다. 아직도 인종차별정책을 공공연히 실시하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어째서 미국이 계속 경제적 및 기타 교류하고 있는가를.”
‘나비같이 떠서 벌처럼 쏜다’는 말 말고도 “난 약(藥)이 다 병나도록 지독하다”는 그의 말 한두 마디로 세상 어떤 장수의 ‘넋’도 빼 ‘넉-아웃’ 시킬 수 있으리라. “난 네가(다른 사람이) 원하는 사람이 될 필요 없다.”라고 그의 부모와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알리가 한 말대로 우리도 한반도라는 링에서 같은 민족끼리 ‘골빈당’처럼 치고받는 일이 없어야겠고 우리 모두 각자가 자기가 원하는 사람 ‘골찬당’이 되어보자.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