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원의 공간을 지배하는 조각가의 손길이 2차원의 평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올 때, 예술은 어떠한 새로운 조형적 언어를 획득하는가. 조각과 현대 회화의 경계선상에서 물질의 본질을 끊임없이 질문해 온 박종태 작가는 그 답을 ‘해체’와 ‘재구축’이라는 극단의 노동에서 찾는다. 물질적 철학과 관념적 사유를 접목하여 한국 현대미술의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는 박종태 작가가 자신의 예술 세계를 깊고 풍성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입체에서 평면으로, 매체의 경계를 허무는 융합적 시선
한국 현대미술 지형에서 박종태 작가의 존재감은 독특하다. 그는 본래 스테인리스 스틸, 대리석, 화강석, 청동 등 묵직하고 단단한 재료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도시 공간과 자연 환경에 스며드는 대형 공공조형물을 다수 제작해 온 정통 조각가였다. 정형과 비정형의 유기적 곡선을 결합하여 공간에 경쾌한 미학적 온도를 더하던 그가, 최근 수년간 화면 중심의 평면입체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현상은 미술계의 깊은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그의 평면 작업을 단지 ‘회화로의 전향’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박종태 작가의 본질을 놓치는 일이다. 그의 평면은 그가 평생 탐구해 온 입체적 물성 감각과 3차원적 공간 사유가 2차원 프레임 내부로 이식된 ‘확장된 조각’에 가깝다. 캔버스나 패널이라는 제한된 화면 위에서 그는 물질을 으깨고, 얹고, 다지는 조각적 행위를 지속한다. 차원과 매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의 예술적 유연성은 바로 이 탄탄한 조각적 뼈대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매체 간의 자유로운 이동은 예술가가 다루는 재료의 한계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치열한 의지의 소산이다. 입체 예술에서 체득한 공간감과 균형 감각이 평면 위에서 어떻게 재해석되는지 지켜보는 것은 그의 작업을 마주하는 큰 즐거움 중 하나다.
◇텍스트의 해체, 관념의 비움에서 시작되는 물질성의 회복
박종태 작가의 작업실 한구석에는 버려진 서적, 신문, 폐기 문서, 인쇄물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누군가의 지식이자 권위였고, 한때 일상의 촘촘한 정보였을 무수한 텍스트들이 작가의 손을 거치며 잘게 분쇄된다. 작가는 인쇄된 글자가 지닌 고유한 언어적 의미를 고의적으로 자르고 깨뜨린다.
이러한 ‘텍스트 해체’ 작업은 인간이 구성해 놓은 기존의 정보와 관념, 그리고 고정된 가치관을 비워내는 철학적 프로세스다. 문자는 인간의 사유를 전달하는 훌륭한 매개체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인식 체계를 일정한 틀 안에 가두는 한계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를 잘게 파쇄함으로써 문자가 지닌 소통의 기호적 기능을 수거하고, 종이라는 원초적 재료가 가진 순수한 물성 자체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문자는 신념을 담는 그릇이지만, 때로는 인간의 사고를 얽매이는 무거운 틀이 되기도 한다. 버려진 텍스트를 해체하는 과정은 내 안에 쌓인 언어적 관념과 고정관념을 비워내는 작업이다. 비워낸 자리에 비로소 재료 본연의 숨결과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이 들어서게 된다”
언어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역설적으로 언어를 해체함으로써 본질에 다가가려는 그의 시도는, 관객들에게 깊은 사유의 단초를 제공한다. 무언가를 더하는 대신 비워냄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순수한 물질의 생명력은 그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미학적 기반이다.
◇수공업적 몰입과 노동성, 겹겹이 다져진 시간의 레이어
분쇄된 파쇄지 입자들은 먹, 수채 및 아크릴 물감, 그리고 특수 접착제와 섞여 작가의 손끝에서 치열한 반죽 과정을 거친다. 그 반죽은 패널 위에 밀착되고, 작가의 손과 도구에 의해 무수히 눌리고 다져진다. 이 과정은 조각가가 흙을 개어 붙이거나 돌의 결을 따라 정질을 하는 몰입의 노동과 완벽히 궤를 같이한다.
수없이 반복되는 작업 속에서 종이 입자들은 화면 위에서 정교한 밀도를 형성한다. 멀리서 보면 정갈한 단색조 회화나 차분한 릴리프(부조)처럼 보이지만, 작품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 표면은 경이로울 정도로 복잡하고 깊이 있는 미세 텍스처를 드러낸다. 파쇄지 조각 하나하나가 이룬 물리적 레이어는 작가가 쏟아 부은 시간의 흔적이자, 정직한 수공업적 노동이 완성한 미학적 결실이다. 관객은 매끄럽게 가공된 디지털 시대의 매체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질감적 울림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노동집약적 과정은 작가 자신의 내면을 다듬고 정화하는 일종의 수행적 성격을 띤다. 화면 위에 쌓이는 물리적 레이어만큼이나 그의 예술적 깊이 또한 단단하게 영글어가는 것이다.
◇차원을 넘어선 정신적 유영과 명상의 공간
박 작가의 대표 작업 시리즈인 ‘심연-유(遊)’는 바로 이러한 물질적 정제 과정을 통해 도달한 정신적 승화의 결과물이다. '심연'이 비워진 언어 너머의 아득한 내면과 존재의 근원을 상징한다면, '유(遊)'는 그 안에서 거닐며 자유롭게 노니는 예술적 유영을 의미한다.
그의 ‘심연-유’ 시리즈 화면은 주로 묵직한 단색조를 띤다. 먹의 그윽한 담백함이나 깊은 푸른빛, 혹은 흙의 기운을 담은 톤들이 화면 전체를 지배한다. 빛의 각도와 관객의 시선 이동에 따라 반응하는 표면의 미세한 음영은 화면에 은은한 3차원적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작가로서 세상을 다루어 온 감각이 화면의 깊이감으로 재탄생한 순간이다. 관람객들은 마치 아득한 자연의 품이나 깊은 명상의 시공간으로 빠져드는 듯한 압도적 몰입감을 경험한다.
이 공간에서 관객은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온전히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 비워진 화면이 선사하는 사색의 여백은 현대인들에게 소중한 치유와 휴식의 장소가 되어준다.
◇본질을 향한 끊임없는 해체와 재구축의 여정
극단적인 물성 탐구와 철학적 비움을 거쳐 박종태 작가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역설적이게도 ‘관념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다. 문명의 부산물인 텍스트를 해체하여 순수한 자연의 질감으로 돌려놓듯,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접하는 관객들 역시 일상의 무거운 관념과 틀을 내려놓고 마음의 ‘심연’을 거닐기를 제안한다.
안주하지 않는 작가 정신으로 스스로의 틀을 파쇄하고 조형적 지평을 끊임없이 확장해 가는 박종태 작가. 3차원 조각의 당당함과 2차원 평면의 깊은 침묵을 조화롭게 접목해 내는 그의 손끝에서, 한국 현대미술이 나아갈 또 하나의 미학적 성취가 묵묵히 세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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