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숙 칼럼] 떠나지 않는 마음이 만드는 책

민은숙

바람 끝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면 나무는 조용히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한다. 여름 내내 햇빛과 비를 받아들인 잎들이 제 몫을 마치면, 가지 끝에는 어느새 단단해질 열매가 자리를 잡는다. 눈에 띄는 변화는 가을에 이르러서야 나타나더라도 결실을 위한 시간은 이전부터 시작된 셈이다. 글쓰기도 그러하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권의 책이 뚝딱 태어나지는 않는다. 한 줄의 메모, 미처 다 쓰지 못한 일기, 마음에 오래 남은 장면 하나가 쌓이고 다듬어져 비로소 한 편의 글들이 서로의 손을 잡을 때 비로소 책의 형태를 갖춘다.

 

글쓰기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이들만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문장이 처음부터 유려하고 삶의 경험이 남달라야만 책을 낼 수 있다고 여기는 이도 있다. 출판 지원 프로그램의 지도강사로 예비 저자들을 만나며 얻은 답은 달랐다. 책을 완성해 낸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원고 앞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수업에 꾸준히 참여해 과제를 빠뜨리지 않고, 피드백을 받은 뒤 원고를 고쳐 썼다. 글을 잘 쓰는 일은 정직하게 쓰고, 읽고, 다시 고쳐 쓰는 습관에서 비롯됨을 몸소 증명해 보인 셈이다.

 

처음 수업에 온 예비 저자들은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제가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제 이야기가 책이 될 만할까요?”, “무엇부터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질문 속에는 설렘과 함께 두려움이 섞여 있다.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한 처음부터 완벽한 원고는 없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기 삶을 찬찬히 바라보려는 마음이다. 아침 창문으로 들어온 빛, 오래된 물건 하나에 얽힌 기억, 가족과 나눈 한마디, 일상에서 마주친 사람들과 계절의 변화 모두가 글의 씨앗이다. 평범한 하루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발견하는 일이 글쓰기의 진짜 첫걸음이다.

 

예비 저자에게 가장 먼저 권하는 실천은 ‘하루 한 문장’ 쓰기다. 유독 마음에 남은 풍경이나 차마 하지 못한 말을 한 줄로 적어보자. 잘 쓰려는 부담감 때문에 시작을 미루지 않기를 바란다. 정해진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한 문장이라도 적어 내려가는 습관이 쌓이면, 글쓰기는 어느새 삶의 일부가 된다. 글쓰기 노트를 마련해 떠오르는 생각과 문장을 그때그때 기록하는 것도 좋다. 기억은 생각보다 빠르게 사라진다. 버스 창밖으로 스친 장면, 누군가의 말투, 문득 떠오른 어린 시절의 냄새는 붙잡아 두지 않으면 금세 흐려진다. 단어 몇 개, 질문 하나, 감정의 조각만으로도 충분하다. 시간이 지난 뒤 메모를 다시 펼쳐 보면 반복해서 등장하는 장소나 사람, 오래 머무는 감정이 당신의 책이 향할 주제가 될 수 있다.

 

아쉽지만 많이 쓰는 것만으로 좋은 글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글은 퇴고를 거치며 빛을 얻는다. 초고를 쓴 직후에는 자기 문장에 익숙해져 허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며칠간 글을 묵혀두었다가 낯선 독자의 눈으로 다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뜻이 겹치는 수식어와 지나치게 긴 문장은 과감히 덜어낸다. 덜어내기는 꼭 남겨야 할 메시지를 더 또렷하게 세우는 작업이다. 소리 내어 읽어보는 방법도 추천한다. 눈으로 읽을 때는 지나쳤던 어색한 호흡과 불필요한 중복이 귀에는 또렷하게 들린다. 감정을 크게 외치기보다 구체적인 장면 속에 조용히 스며들게 만들 때 훨씬 깊은 울림을 준다. 타인의 피드백을 수용하는 용기 또한 원고를 완성으로 이끄는 단단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돌이켜보면 출판의 결실을 얻은 이들은 하나같이 성실했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단 한 번 수업을 비웠던 한 수강생은 보강 내용을 꼼꼼히 챙기고 원고를 끝까지 수정해 제출하며 결국 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 야근이 예정된 날에도 월차를 내며 배움을 이어간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겠다는 마음을 성실한 수정으로 증명해 냈다. 출판의 기쁨은 꾸준한 시간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만약 공모전이나 출판 지원 사업에 도전하려는 예비 저자라면 준비 절차도 꼼꼼히 챙겨야 한다. 모집 요강과 서류 형식을 확인하는 일은 기본이다. 원고를 한 권으로 묶을 때는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정립한 뒤 독자를 자연스럽게 이끄는 목차를 구성해야 한다. 글은 나에게서 출발하지만, 책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세상에 나온다.

 

성실함과 꾸준함은 문장에 그대로 스민다. 오늘 한 줄을 쓰겠다는 약속, 내일도 원고 앞에 앉겠다는 다짐, 고쳐 쓴 글을 다시 읽어보는 인내가 쌓일 때 글에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계절이 깊어질수록 잎이 제 색을 더하듯, 저자가 되는 비결 역시 가까이에 있다. 더 잘 쓸 수 있는 완벽한 때를 기다리다 보면 첫 문장은 영영 시작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늘 마음에 남은 장면 하나를 적고, 내일 그 문장을 다시 들여다보자. 차곡차곡 쌓인 문장들은 언젠가 당신만의 소리로 계절의 열매처럼 단단한 한 권의 책으로 익어갈 것이다.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제4회 코스미안상

제3회 문학뉴스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2024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 강사

꿈다락학교 시 창작 강사

문화재단 & 예술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이메일 : sylvie70@naver.com

 

작성 2026.08.19 09:29 수정 2026.08.1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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